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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그 길을 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무는 ‘배리어프리’가 확산하는 가운데 엔터 분야의 장벽은 여전히 높고 견고하다. 국내 최초 장애 아티스트 전문 엔터사인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는 세계 최초 청각장애인 보이 그룹 빅오션과 함께 그 벽을 넘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출처: 차해리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 대표
장애인의 날인 지난 4월 20일 세계 최초의 청각장애인 아이돌 ‘빅오션’이 데뷔했다. 3인조 보이 그룹으로 멤버 전원이 청각장애인인 이들은 여느 아이돌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노래하고 춤을 춘다. 빅오션은 목소리 데이터를 딥 러닝한 AI 기술의 도움을 받아 음성 언어로 음원을 제작한다. 여기에 한국어 수어·영어 수어·국제 수어로도 노래한다. 안무 타이밍이나 박자는 플래시라이트나 진동이 느껴지는 손목시계 형태의 메트로놈으로 맞춘다. 이들의 데뷔에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기구가 공식적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장애로 인한 장벽과 사회적 편견을 깨트리고, 장애 예술인을 넘어 장애계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였다.
빅오션이 데뷔하기까지 소속사인 국내 최초 장애 아티스트 전문 엔터테인먼트사 ‘파라스타엔터테인먼트’(이하 파라스타)의 공이 컸다. 캐스팅과 오디션을 통해 멤버들을 모으고, 딥 러닝 프로그램을 포함한 각종 AI 기술을 적용해 노래와 안무 연습을 원활하게 도왔다. 파라스타를 이끄는 차해리 대표는 YTN 앵커 출신으로 SBS ‘골 때리는 그녀들’ 등을 통해 대중에게도 익숙한 인물이다.
그가 장애 전문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구상한 것은 2018년이다. 당시 아나운서로 일하던 차 대표는 1988년에 열린 서울패럴림픽 30주년 기념행사 사회를 맡았다. 이를 계기로 만난 선수들로부터 이들이 광고·방송 제의를 받아도 실제로 성사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간에 에이전시가 있으면 원활하게 성사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2020년 파라스타를 세웠다. 이어 스포츠 선수, 예술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16명의 아티스트를 영입해 본격적으로 에이전시 사업에 나섰다.
하지만 이는 결국 수수료 외의 수익구조를 내기 어려웠다. 수수료마저도 쉽게 벌리지 않았다. 에이전시로 활동하기에 앞서 소속 아티스트들의 캐스팅 자체가 난항을 겪었기 때문이다. 소속사 내 프로덕션을 운영하며 자체 콘텐츠를 촬영하고 레퍼런스를 쌓아갔지만 이 또한 한계에 부딪혔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비장애인 아티스트들도 혹한기인 상황에서 방송이든 관련 분야든 장애 아티스트를 기용할 여력은 많지 않았다. 아티스트를 본업으로 이어가기에는 수익도 낮고, 대부분의 장애 아티스트는 본업이 있는 상황에서 불안정하게 부업으로 아티스트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차 대표는 연예인이라는 직업만으로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수익이 확실하고, 대중적으로도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아이돌’이 답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본격적으로 아이돌을 기획하기에 앞서 각종 엔터 산업 종사자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의견을 구했다. 당시 소속사 연습생으로 있던 빅오션 멤버들을 보여주면서 아이돌로서의 성공 가능성을 점쳐달라고도 요청했다. 돌아온 답은 절망적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 멤버로는 아이돌 못 만들어.”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지만 빅오션은 지난 4월 1세대 아이돌 그룹 H.O.T.의 대표곡 ‘빛 (Hope)’을 리메이크한 곡으로 데뷔했다. 이어 2달 만인 지난 6월 신곡 ‘BLOW’로 컴백에도 성공했다. 인스타그램과 틱톡 팔로어 약 40만 명, 유튜브 구독자 약 12만 명을 모으며 팬덤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7월 중 영상통화 팬 미팅 및 오프라인 팬 미팅도 기획하고 있다. 나아가 각종 브랜드와 협업해 숏폼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광고도 논의 중이다. 차 대표와 지난 6월 11일 서울 강남구 파라스타 사무실에서 만나 국내 최초 청각장애인 아이돌의 데뷔 과정부터 장애 관련 엔터 산업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세계 최초 청각장애인 아이돌 ‘빅오션’(왼쪽). 세븐틴, 라이즈 등 인기 K-팝 보이 그룹과도 여러 챌린지를 촬영했다.
다들 데뷔가 불가능할 거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외모, 춤, 노래 모두요(웃음). 아이돌은 고사하고, 대형 엔터 회사의 연습생으로도 합격할 아이가 없다더군요. 하지만 이 3가지 모두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우선 외모의 경우, 제가 아나운서 준비를 해봤기 때문에 외모는 쉽게 바뀔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성형수술 없이도 카메라 마사지를 받다 보면 얼굴에 쓰는 근육이 달라지고, 잘 맞는 화장법도 찾을 수 있거든요. 자주 웃으면 입꼬리 근육이 발달하고, 광대뼈가 올라가면서 음영감이 달라져요. 외모에 관한 평가가 신경 쓰이지 않은 이유죠. 춤 역시 노력으로 해낼 수 있는 영역이었기에 시간만 들인다면 분명 바뀔 수 있다고 믿었어요. 마지막으로 노래도 AI 기술 등을 활용한다면 어느 수준까지는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빅오션은 4번째 멤버를 찾기 위한 오디션을 진행하고 있다. 차 대표는 “3인조이기에 한 사람이라도 다치거나 아파서 활동을 못 하면 타격이 크기 때문”이라며 “인원이 4명 이상이 되면 동선도 더 다채롭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이작 굿윈(왼쪽), 피터 딘클리지(맨 오른쪽). 해외에서는 장애가 있는 배우들도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한다.
파라스타가 엔터사로서 갖는 차별점이 궁금합니다.
이전에는 장애 아티스트의 일을 전담으로 처리하는 국내 엔터 회사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장애 관련 전문성이나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다 보니 장애 아티스트들의 활동을 원활히 도울 수 있어요. 예컨대 청각장애인 아티스트는 컨디션이 안 좋으면 청력이 더 나빠질 수가 있습니다. 휠체어를 탄 아티스트의 경우 배리어프리가 안 된 현장에서는 이동이 어렵기도 하고요. 이 같은 상황을 직접 촬영 현장에서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때 저희가 대신 소통해서 상황을 알리고, 일정을 조율합니다. 촬영 현장에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등을 미리 확인하기도 하고요.
그간 장애 관련 사업들이 지속적으로 성공한 케이스가 적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요.
장애 관련 사업의 창업자들은 ‘좋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경우가 많아요.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비즈니스로 돈을 벌 생각보다는 장애인 아티스트들이 더 편하게 활동하고, 꿈을 펼치는 방안을 찾는 데 집중했죠. 그러다 보니 창업 후 3년 동안은 흑자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돈을 벌어야만 좋은 일도 오랫동안 할 수 있겠더라고요. 사업의 본질은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애 섹터에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마음과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마음에 앞서, 이를 통해 어떻게 수익을 낼 것인가부터 고안해내야 해요. 자선이 아닌 ‘사업’을 결심했다면 냉정히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장애 관련 콘텐츠의 성장 가능성은 어떻게 전망하나요.
최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등 장애인들이 주연급 캐릭터로 등장하는 콘텐츠가 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정은혜 작가처럼 실제 장애인이 장애인 역할을 맡는 사례도 늘어날 것으로 보여요. 나아가 장애인이라는 캐릭터를 넘어서 다양한 배역을 맡는 것까지 기대해봅니다.
미국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왜소증이 있는 배우 피터 딘클리지가 맡은 ‘티리온 라니스터’ 역이 대표적이에요. 흔히 미디어에서 장애인은 약자, 선하고 무해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혹은 비장애인 배우들의 희생정신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이 많았죠. 하지만 티리온 라니스터는 입담도 좋고, 여자도 잘 유혹하고, 영악한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뇌성마비가 있는 배우 조지 로빈슨이 연기한 넷플릭스 시리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속 ‘아이작 굿윈’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삼각관계 로맨스를 그리는 남자로 등장하죠. 장애는 하나의 특징에 불과해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맡을 수 있는 역할에 제한을 두지 않고, 직업도 성격도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길 바랍니다.
파라스타가 엔터사로서 그리는 다음 스텝은 무엇인가요.
장애라는 특징이 있는 아티스트들도 충분히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첫 번째 레퍼런스를 빅오션으로 보여드리려고 해요. 그렇게 해서 휠체어를 타고도 멋지게 군무를 추는 공연 팀 등 후속 아티스트를 배출하고, 경쟁자가 붙을 수 있을 정도로 산업 규모를 키우고 싶어요. 어린 장애인들은 바리스타나 네일 아티스트 등 장애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직업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경계를 넘어서 아이돌, 댄서, 모델 등 어떤 꿈을 꾸든 응원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빅오션 #배리어프리 #여성동아
사진 김도균
사진출처 빅오션 인스타그램, 넷플릭스, HBO 드라마